프리기두스 전투에 대한 공식적인 내용이 아닌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먼저 프리기두스 전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므로 앞부분은 그 전투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후반부에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겠으니, 반드시 끝까지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프리기두스 전투는 서기 394년, 로마 제국 동부와 서부가 격돌하며 역사를 새롭게 쓴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전투는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대립이 얽힌 가운데 발생했으며, 결국 로마 제국의 종교적 통합과 정치적 방향성을 결정지었습니다. 전투의 배경, 과정, 결과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프리기두스 전투란 무엇인가?
프리기두스 전투는 서기 394년 9월 5일부터 6일까지 로마 제국 동부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서부의 공동 황제 아르보가스트 및 그의 후원자 에우게니우스 간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현대 슬로베니아 프리기두스 강 인근에서 치러졌습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대결을 넘어, 당시 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적 균열과 종교적 대립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국가 종교화를 주도한 테오도시우스와, 로마 전통 신앙의 부활을 시도한 에우게니우스의 대립은 결국 제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갈림길이었습니다.
전투의 배경: 신앙과 권력의 충돌
가. 종교적 대립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확립하려 했습니다. 이는 380년 발표된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는 이교를 금지하고 기독교의 지배적 지위를 강화했습니다. 반면, 에우게니우스는 이교 사제들과 협력하여 로마 전통 신앙의 부흥을 꾀했습니다.
나. 정치적 균열
테오도시우스는 동부를 지배하며 기독교를 중심으로 통일된 제국을 꿈꿨습니다. 반대로, 서부를 장악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는 서방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전투의 과정: 날씨마저 테오도시우스를 돕다
첫째 날: 서방군의 우위
전투 초기,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의 군대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습니다. 서방군은 잘 조직된 방어 태세와 로마 전통 군사 전략을 활용하며 동방군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둘째 날: 기후와 동방군의 반격
9월 6일, 갑작스러운 강풍이 서방군의 진영을 덮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동방군은 강풍의 도움을 받아 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에우게니우스는 결국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아르보가스트는 패배를 인정하고 자결했습니다.
프리기두스 전투의 결과와 영향
가. 기독교의 완전한 승리
전투의 승리로, 테오도시우스는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를 유일한 종교로 확립했습니다. 전통 신앙의 신전은 파괴되거나 폐쇄되었고, 로마 제국의 종교적 다양성은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나. 동서 제국의 재통합
테오도시우스는 전투 후 로마 제국의 동서부를 다시 통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기 395년에 사망했으며, 제국은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분할되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영구적인 분열의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비판적 시각: 전투의 그림자
가. 종교적 독재의 서막
프리기두스 전투 이후, 기독교의 독점적 지위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억압을 초래했습니다. 이교도뿐 아니라 기독교 내 이단들도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 정치적 불안정의 연속
테오도시우스의 통치는 전투로 얻어진 일시적 안정감을 가져왔지만, 그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은 다시금 정치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로 인해 프리기두스 전투의 승리가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을 보장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 프리기두스 전투
프리기두스 전투는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될 때 발생하는 갈등과 폭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교훈: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의 중요성
오늘날, 프리기두스 전투는 강압적 종교 통합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가치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결론
프리기두스 전투는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전투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 통일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종교적 억압과 정치적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전투는 종교와 정치가 얽힌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프리기두스 전투가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
흔히 종교인들은 종교전쟁이라 부를수 있고, 또는 자기가 믿는 기독교의 승리이며 당연히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신다고 설명을 하겠으나, 너무나 편향적인 생각으로 말하는 내용이므로 그런 류의 내용은 무조건 걸러야만 합니다.
만약 로마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렇게 말 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리기두스 전투는 종교 전쟁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 원인은 종교 때문이 아니라 권력 때문입니다. 명분이 종교일 뿐이고, 실제로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것이 목적입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이유도 기독교가 우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쓸모에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하면 좋은 이유
이 당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이며, 예수는 하나님에 준하거나 동격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는 눈에 보이는 인간으로써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을 정치적으로 이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라고 하듯이 황제도 그러하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므로 황제의 말은 곧 신의 말과 같다고 하기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밀착관계가 되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자세히 보면, 종교회의를 했다고 하면서 그것의 주된 발언권 또는 실질 권력자는 종교인이 아닌 황제였습니다.
즉, 황제가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종교 회의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황제 입맛에 맞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그 당시 정립된 황제의 기독교관에 맞는 종교가 기반이 된 종교로 되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실제 역사가 아무리 글로 남겨있더라도, 종교에 세뇌된 자들은 절대로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오로지 그들의 시야에 파묻혀서 믿고싶은 것만 믿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상황은 변질된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서양 세력이 한국을 건국할때 침투한 기독교 세력으로 인해 세워진 참담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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