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역사와 신화의 경계에 선 인물
한국에서 클레오파트라 라고 하면 미인의 척도 또는 최소한 미인의 반열에 드는 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사대적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것에 대한 내용은 글의 마지막에 쓰겠습니다. 우선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가장 논쟁적인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의 통치는 이집트의 정치적 독립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녀의 삶은 수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의 영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매혹적인 여성으로 묘사되기보다 뛰어난 정치적 전략가이자 외교관으로 평가받을수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배경과 초기 생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빛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ic Dynasty)의 일원이었으며, 그녀의 통치는 왕조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습니다. 기원전 69년에 태어난 클레오파트라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와 외교를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로마 제국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이집트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다재다능한 언어 능력
클레오파트라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그녀의 통치에 큰 강점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이집트어를 사용하는 몇 안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이는 그녀가 대중과 소통하고 지지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거물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동맹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와의 동맹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정치적 연합으로, 로마와 이집트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와의 아들 카이사리온(Caesarion)은 이 연합의 상징적 결과로 여겨집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연합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또 다른 강력한 지도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연합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로마 내전과 악티움 해전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이들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통해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통치와 업적
이집트의 경제와 문화 부흥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문화를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그녀는 농업과 무역을 활성화하여 왕국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이집트의 고유 문화를 보호하려 노력했습니다.
여성 지도자로서의 한계
클레오파트라의 통치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여성 지도자는 드물었으며, 그녀는 종종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지능과 전략으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며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비극적 최후
악티움 해전 이후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는 이집트와 로마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으로,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죽음과 전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독사를 이용해 자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입니다. 그녀의 죽음으로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흡수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비판적 시각
매혹적 이미지의 과장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적으로 종종 매혹적인 여왕으로만 묘사되어 왔습니다. 이는 그녀의 정치적, 외교적 업적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그녀의 지적 능력과 리더십은 단순히 외모로 평가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실패한 외교 전략?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로마와의 연합이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녀는 로마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집트를 보호하려 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이집트를 독립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클레오파트라
강한 여성의 상징
오늘날 클레오파트라는 강한 여성 리더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녀의 삶은 여성의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현대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자주 언급됩니다.
미디어와 문학 속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수많은 문학 작품, 영화, 연극에서 다뤄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들은 종종 그녀의 정치적 역량보다 그녀의 매력과 로맨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클레오파트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미인인가?
클레오파트라에 앞서서 미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미적인 완성으로 알려진 황금비율은 가장 조화롭게 여겨지는 비율입니다. 이 기준에 맞추어 사람의 이목구비의 위치가 잘 배치되어 있다면 미인으로 봅니다.
또 한가지 미인의 기준으로 삼는것은 문화적 요소가 있습니다. 아무리 황금비율이라 할지라도 그 문화권에 맞지 않는 얼굴이라면 그것은 미인으로 보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시기에 여인들이 전부 머리를 까버린 이유는 당시 미인의 기준이 그러하였기 때문이지만 현 시대에 그렇게 한다면 황비홍 소리를 듣게 됩니다.
또한 서양권과 동양권의 미의 기준도 다릅니다. 즉 미인의 기준은 시대별, 상황별로 달라지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당 시대의 미인의 기준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를 본다면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에 권력으로 미인의 위치를 가져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즉 당시의 기준일 뿐, 현재의 기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현 시대에서 한국은 서방세력의 문화 선동에 수십년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의 한류의 속을 뜯어보면, 그 내용이나 자금력이 전부 서방세력의 것임을 알수 있죠. 그러므로 보여지는 것들은 한국의 것이 아닌 서방세력의 문화가 한국인의 형태로 포장된것 뿐입니다.
이런 상태로 수십년간 한국의 정신이 서양화 되다보니, 한국 고유의 미적 기준에 맞지 않는 클레오파트라가 미인으로 등극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을 들여 공들은 서방세력의 사대교육의 결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중국에 대한 사대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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