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외국인, 호머 헐버트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고 그가 왜 오늘날에도 조명받아야 할 인물인지 알아봅니다. 그리고 무능한 고종의 조선시대를 비판합니다.
호머 헐버트: 한국의 친구이자 독립을 위한 투사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한국의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이자 교육자, 언론인, 그리고 고종의 조선왕조를 위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조선 말기 한국에 와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며, 조선왕조의 독립을 위해 전 세계에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의 활동은 당시 세계가 조선을 잘 알지 못하던 시기였습니다. 헐버트는 선교사로서 활동하면서, 외교, 교육, 그리고 언론을 통해 한국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무능한 조선의 고종부터 시작하여, 사대부와 썩어빠진 탐관오리들이 겪는 고통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헐버트: 근대 한국 교육의 초석을 놓다
헐버트는 1886년 조선에 도착해, 당시 왕립학교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의 교육이 매우 낙후되어 있음을 보고, 서양의 교육 방식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가르친 학생들은 이후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인재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헐버트는 한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서구에 알리고, 한글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서양의 알파벳과 비교해 한글이 매우 우수한 문자임을 강조하며, 한국인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헐버트의 교육 활동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식과 정신을 함께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헐버트의 업적은 지금까지도 한국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언론인으로서의 헐버트: 세계에 한국을 알리다
헐버트는 조선에서의 활동 중 언론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그는 이를 불법적인 강제조약으로 규정하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언론에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미 세계는 일본이 조선을 속국으로 한 것은 매우 타당하며 옳은 결정이라고 찬성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서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일본의 조선식민지에 대한 세계의 의식이 그러했으므로, 당연히 이 시도가 실패로 끝났지만, 헐버트는 고종을 위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습니다. 이는 그가 조선 왕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활동가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헐버트의 한글 연구: 한국 언어에 대한 사랑과 이해
호머 헐버트는 한글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양인 중에서도 한글의 과학적 구조를 연구한 선구자였습니다. 헐버트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문자"라고 평가하며, 조선의 언어가 지닌 우수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는 조선어 연구를 통해 조선어 문법(The Korean Language)이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서양에서 조선어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한글의 문법적 체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첫 번째 시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헐버트의 유산: 한국 역사 속 영원한 외국인 친구
호머 헐버트는 비록 조선이 독립을 이루기 전인 1949년 사망했지만,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기념되고 있습니다. 그의 열정과 헌신은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를 통해 한국은 서구 사회에서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가 죽은 후 2009년 건국훈장을 수여하며 그를 기념했습니다. 이는 헐버트가 한국 독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며, 한국인들이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론
호머 헐버트는 고종의 조선 왕조를 위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습니다. 그의 삶과 업적을 돌아보면, 그는 한국을 사랑하며 끝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판
당시 고종은 국제 정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조선의 왕으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즉 고종은 조선왕조를 재건하여 다시 백성을 노예로 착취하던 조선시대로의 회기가 목적이었습니다. 호머 헐버트의 밀서활동이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당시 국제사회가 일본의 조선점령을 찬성하였으며 정당하다고 했던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인이 반일 선동에 놀아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강단사학자(역사는 실증 없는 이론과 중국에서 주는 역사만 무조건 옳다고 하는 서울대 교수의 것이 정답인 현실)가 내놓는 역사서로 공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종은 무능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일본이 조선에 들어와서 신분철폐한 것을 너무나 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자식 대대로 가축 취급당하는 노예신세에서 벗어나게 된 신분철폐를 누가 마다할까요?
당연히 극도로 싫어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바로, 그 노예를 물건으로 소유하던 양반과 탐관오리, 그리고 지배층입니다. 조선 왕실은 당연합니다. 그런 소수의 지배층은 95% 이상의 노예 및 중, 상인의 세금을 뜯어먹으며 호의호식하였습니다. 지금의 공산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본은 악질 중의 악입니다. 그러나, 백성인 노예와, 중, 상인들에게 일본은 천사 중의 천사입니다.
그 지배층이 자리 잡고 있던 지역은, 노예를 많이 부릴 수밖에 없던 농지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전라도 평야지역과, 경상도 농토지역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극성 좌파가 전라도와, 안동지역인 것은 당연합니다.
좌파의 뿌리가 지배층이다 보니, 그 지배층의 습성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늘 노력 없이 남의 것 훔쳐서 자기가 쓰거나, 자기가 잘못한 것 남에게 뒤집어 씌우기 하거나, 자기 잘못 남이 대신 죽게 만드는 짓을 현재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사대하던 그 습성도 못 버려서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대다수였던 피 지배층인 국민이 왜 이리 힘을 못쓸까요? 5%도 안 되는 지배층을 전복시켜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면 과거 호머 헐버트가 정황 파악 못하고 밀서를 가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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