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흔히 육지의 금관 문화로만 기억되곤 하지만, 사실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는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 있었던 강력한 해양 국가였습니다. 그들의 번영과 국제적인 위상은 뛰어난 항해술과 해상 활동 없이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신라의 항해술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당시 동아시아 해상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 민족의 해양 활동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빛나는 유산입니다.
해양 강국 신라와 항해술의 중요성: 바다가 열어준 번영과 국제 교류의 시대
삼국통일 이후의 통일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해상 역량을 흡수하고, 당(唐)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 국가로 급부상했습니다. 이 시기의 신라에게 바다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국제 무역, 외교적 소통, 문화 교류, 그리고 국가 안보를 위한 핵심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신라의 번영은 육지의 농업 생산력뿐만 아니라,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활발한 교류와 물자 이동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특히, 신라와 당을 잇는 해상 무역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하고 활발한 무역로 중 하나였습니다. 신라의 상선들은 이 길을 따라 비단, 도자기, 차, 서적 등 당의 물품을 들여오고, 신라의 특산품인 인삼, 금은 세공품, 나전칠기 등을 수출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해상 무역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항해술과 선박 기술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신라의 해상 활동 중요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시는 매우 많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에 정기적으로 조공(朝貢) 사절단을 파견하고, 당으로부터 책봉(冊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외교 관계 유지는 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을 높이고 안정적인 국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사절단은 수많은 인원과 예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야 했으므로, 이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항해술과 선박 기술 발전을 장려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습니다. 신라방(新羅坊)과 신라소(新羅所)라 불리는 신라인 거류지가 일본 각지에 형성될 정도로 교류가 활발했으며, 신라의 선박들이 일본과 오가며 무역과 문화 교류를 이끌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바다는 중요했습니다. 해적의 창궐은 해상 무역로를 위협하고 해안 지역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신라는 이러한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하고 해상 군진(軍鎭)을 설치했습니다. 완도(莞島)에 설치된 청해진(淸海鎭)은 해적 소탕과 해상 무역 보호를 위해 설치된 대표적인 해상 군진이며, 장보고(張保皐)라는 인물은 뛰어난 해상 지휘력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해상 질서를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신라의 해상 활동은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국가의 번영, 외교, 문화, 그리고 군사적인 안정을 확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의 항해술은 이러한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었습니다. 바다는 신라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자,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무대였던 것입니다.
신라의 선박 건조 기술: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견고함과 항해 성능
신라시대의 해상 활동 규모와 항해 거리를 고려할 때, 당시 신라는 상당한 수준의 선박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고려나 조선 시대에 비해 구체적인 선박 유물이 적고 문헌 기록이 상세하지는 않지만, 당, 일본, 심지어 아라비아까지 이르는 장거리 항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견고하고 항해 성능이 뛰어난 선박이 필수적이었을 것입니다. 신라 선박의 특징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려진 바는 많지 않으나, 당시 동아시아 선박들의 일반적인 특징과 신라의 해상 활동 목적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선박들은 주로 목선이었으며, 선체를 구성하는 목재를 짜 맞추고 이음새를 꼼꼼하게 막아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 중요했습니다.
신라의 선박 기술 수준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로는 중국 문헌이나 일본 문헌에 기록된 신라 선박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측 기록에서는 신라의 배가 견고하고 항해 능력이 뛰어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는 신라가 당시 국제적인 기준으로도 인정받을 만한 선박 건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신라의 해상 활동이 주로 서해와 동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각 해역의 특성에 맞는 선박을 개발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많은 서해에서는 평저선(平底船)과 유사한 구조의 배가 연안 항해에 유리했을 것이고, 파도가 높은 동해나 먼바다 항해에는 안정성과 속도를 갖춘 선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신라의 선박 기술은 특히 해상 군사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발전했습니다. 해적 소탕이나 해상 방어를 위한 군함은 상선과는 다른 구조와 기능을 가졌을 것입니다. 빠른 기동성과 전투에 유리한 구조를 갖춘 군함 건조 기술은 신라 해군의 역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청해진과 같은 해상 군진의 설치는 이러한 군함 건조 및 운용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비록 현재까지 발굴된 신라시대 선박 유물이 많지 않아 상세한 구조나 기술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수많은 문헌 기록과 해상 활동의 규모를 통해 신라가 당시 동아시아 해상 강국에 걸맞은 뛰어난 선박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 선박은 그들의 활발한 해상 활동을 가능하게 한 물리적인 기반이었으며, 국제 교류와 국가 안보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라의 항해 지식과 기술: 별을 읽고 바람을 아는 바다의 지혜
신라시대의 항해술은 오늘날처럼 정밀한 과학 기술보다는 수많은 항해 경험과 자연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기반했습니다. 당시 신라의 항해사들은 자연이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읽고 해석하여 복잡한 해상 환경 속에서 길을 찾았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항해 기술은 지표 항해(Coastal Piloting)였습니다. 한반도의 복잡한 해안선과 수많은 섬들을 따라 항해할 때, 항해사들은 특정 산봉우리, 해안선의 모양, 눈에 띄는 바위나 나무, 그리고 사찰이나 건축물과 같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항로를 유지했습니다. 이는 연안 항해나 섬 사이를 오갈 때 매우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먼바다 항해나 밤에는 천문 항해(Celestial Navigation)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항해사들은 태양, 달,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의 위치를 관찰하여 방향과 시간을 짐작했습니다. 특히 북반구에서는 북극성(Polaris)이 거의 움직이지 않으므로,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하여 대략적인 위도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자신의 위치가 남쪽으로 얼마나 내려왔는지 또는 북쪽으로 얼마나 올라갔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정밀한 천문 관측 장비가 발달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천문 항해는 주로 숙련된 항해사들의 경험과 눈대중에 의존했을 것입니다.
천문 지식 외에도 바다의 자연 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었습니다. 항해사들은 조류의 흐름과 세기, 바람의 방향과 강도, 파도의 모양과 주기 등을 관찰하여 날씨 변화를 예측하고 항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특히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복잡한 서해에서의 항해는 정확한 물때 파악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썰물이나 밀물의 방향과 속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배가 좌초되거나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항해 지식과 기술은 주로 선장(船長)이나 해사(海師)와 같은 숙련된 뱃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도제식 교육, 그리고 구전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들은 수십 년간 바다를 누비며 얻은 실질적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안전한 항로, 위험한 해역, 식수와 식량을 보충할 수 있는 정박지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습니다. 문헌 기록에 직접적으로 신라 항해사들의 기술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많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신라 선박들이 당이나 일본까지 안전하게 왕래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신라의 항해 지식과 기술이 국제적인 수준에 부합했음을 증명합니다. 신라의 항해술은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단련된 실용적인 지혜의 산물이었습니다.
신라의 항해 장비와 도구: 최소한의 도구로 최대의 효과를 얻다
신라시대 항해사들이 사용했던 구체적인 항해 장비나 도구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나 유물은 매우 드물어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기술 수준과 신라의 항해 활동 규모를 고려할 때, 기본적인 항해를 돕는 도구들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추정되는 것은 나침반(羅針盤)입니다. 나침반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발명되어 사용되었으며, 신라와 당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신라에도 나침반이 도입되어 항해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나침반은 흐린 날이나 밤에도 일정한 방향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이는 장거리 항해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도구였습니다.
나침반 외에 항해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도구로는 수심을 측정하기 위한 간단한 장비들이 있습니다. 밧줄 끝에 납덩이 등을 매달아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보내는 방식으로 수심을 파악하고, 납덩이에 묻어 올라온 해저면의 흙이나 모래를 확인하여 자신의 위치나 안전성을 짐작했습니다. 또한, 항구와 항구 사이의 항로에 대한 정보는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으며, 이러한 정보를 그림이나 간단한 기호로 표시한 해도(海圖)나 항해도가 제작되어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비록 오늘날처럼 정밀한 축량 기술로 만들어진 해도는 아니었겠지만, 주요 섬, 해안선의 특징, 위험한 암초의 위치 등을 기록하여 항해사들의 참고 자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시대의 항해 장비는 현대의 정교한 기계 장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원시적인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 항해에서는 이러한 도구들 못지않게 숙련된 항해사 개인의 경험, 직감, 그리고 자연을 읽는 능력이 훨씬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나침반이 대략적인 방향을 알려주더라도, 정확한 항로를 따라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바람과 조류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별의 위치와 높이를 정확히 파악하며, 해안선의 지형지물을 식별하는 항해사들의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신라의 항해 장비는 당시 이용 가능한 기술의 한계 속에서도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하려 노력했으며, 이는 신라 항해사들이 최소한의 도구를 가지고 거친 바다를 탐험하고 성공적으로 항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부족한 장비를 뛰어난 기술과 경험으로 보완하며 바다를 누볐던 신라 항해사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주요 해상 항로와 네트워크: 동아시아를 잇는 바다의 길
통일신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해상 활동은 당나라와의 교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신라와 당을 잇는 주요 해상 항로가 발달했습니다. 가장 활발했던 항로는 한반도의 서해안(특히 지금의 충청남도 태안반도와 전라남도 해남 등지)에서 출발하여 중국 산둥(山東)반도의 등주(登州)나 양저우(揚州)와 같은 항구로 이어지는 노선이었습니다. 이 항로는 황해(서해)를 가로지르는 비교적 짧은 거리였지만, 복잡한 조류와 예측 불가능한 기상 변화 때문에 항해에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산둥반도 인근 해역은 암초가 많고 안개가 짙게 끼는 경우가 잦아 위험한 구간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신라와 일본을 잇는 동해(일본해) 항로도 활발했습니다. 신라의 선박들은 동해안의 주요 항구(예: 명주<강릉>, 울산 등)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규슈(九州)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이 항로는 주로 사절단 파견이나 제한적인 무역, 그리고 일본에 건너간 신라인 공동체와의 왕래에 이용되었습니다. 동해는 서해에 비해 수심이 깊고 파도가 거칠 때가 많아 또 다른 종류의 항해 기술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러한 주요 항로들을 통해 신라는 동아시아 각국과 촘촘한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단순히 신라와 당, 신라와 일본 간의 직접적인 교류를 넘어, 당의 항구를 통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멀리 아라비아까지 연결되는 국제적인 해상 무역망에 편입되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이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까지 찾아와 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신라의 해상 네트워크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인 교류는 신라에 막대한 경제적 부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유교, 예술,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선진 제도와 기술, 서역의 이국적인 상품과 문화 등이 바다를 통해 신라로 유입되면서 신라 문화의 융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신라의 항해술은 단순히 배를 운항하는 기술을 넘어,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고 다양한 문명이 교류하는 통로를 여는 문명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바다는 신라에게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었으며, 항해술은 그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신라 해상 활동의 위험과 도전: 자연의 위협과 해적의 창궐
신라시대의 해상 활동은 수많은 위험과 도전이 뒤따랐습니다. 현대처럼 안전 장비나 정확한 기상 예측 시스템이 없었던 시대에 바다 항해는 언제나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는 자연재해였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폭풍과 거친 파도는 작은 선박에게 치명적이었으며, 특히 계절풍의 변화 시기에는 더욱 위험했습니다. 서해의 짙은 안개는 시야를 가려 방향 감각을 잃게 하거나 암초에 부딪힐 위험을 높였고, 복잡하고 빠른 조류는 배를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자연적인 위험 외에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위협은 바로 해적의 창궐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에는 신라 해적, 당 해적, 일본 해적 등 다양한 세력의 해적들이 출몰하여 해상 무역선과 조공선, 그리고 해안가 마을을 약탈했습니다. 특히 9세기 초 해적 활동은 극심해져 신라의 해상 무역로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신라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고, 해안 지역 주민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해적 문제를 해결하고 해상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신라 정부는 해상 군진을 설치하고 해군력을 강화했습니다. 완도에 설치된 청해진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했으며, 장보고는 이곳을 거점으로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동아시아 해상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활동 덕분에 신라의 상선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당과 일본을 오갈 수 있게 되었고, 신라의 해상 무역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장보고 사후 청해진이 혁파되면서 해적 문제는 다시 고개를 들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인 불안정 또한 해상 활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나라 말기의 혼란이나 일본 내에서의 정세 변화는 해상 무역로의 안전성을 위협하고 신라와의 교류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위험과 도전 속에서도 신라의 항해사들과 해상 활동 종사자들은 굴하지 않고 바다를 누볐습니다. 뛰어난 항해 기술, 견고한 선박, 그리고 용감한 정신으로 자연의 위협과 인위적인 재난에 맞섰습니다. 수많은 배가 침몰하고 인명을 잃는 비극도 있었지만, 바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외교적 이익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신라 해상 활동의 위험과 도전은 당시 항해술과 해상 방어 시스템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바다 개척자들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신라의 해상 인물들: 바다 위에서 역사를 만든 사람들
신라시대의 항해술과 해상 활동의 빛나는 역사는 바로 바다 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단연 장보고(張保皐, ?~846)입니다. 그는 원래 신라의 평범한 백성이었으나 당나라로 건너가 군인으로 활약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해적이 창궐하여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 현실을 보고 흥덕왕에게 청하여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습니다. 장보고는 이곳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 해상 안전을 확보했으며, 나아가 신라, 당, 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활동은 단순한 무역상이나 군인을 넘어, 해상 교통로를 보호하고 국제 질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장보고는 뛰어난 항해 능력, 해상 지휘력, 그리고 국제적인 안목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장보고 외에도 수많은 신라의 상인들이 바다를 누볐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위험한 항로를 개척하며 신라의 상품을 해외로 팔고 외국의 진기한 물품을 들여왔습니다. 장보고의 휘하에서 해적 소탕에 나섰던 군인들, 당이나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단과 그 수행원들, 불교 경전을 구하거나 새로운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승려(예: 혜초(慧超), 704~787?)와 학자들 역시 항해술을 통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여행기를 남겨 당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으며, 그의 여행 역시 바다와 육로를 넘나드는 장거리 항해와 이동이 수반되었습니다.
이러한 해상 활동의 성공은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장인들, 항구에서 배를 관리하고 화물을 운송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실제 배 위에서 노를 젓고 돛을 올리며 선박을 운항하는 뱃사람들(선원들)의 노고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들은 비록 역사 기록에 이름이 남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풍부한 경험과 숙련된 기술로 신라의 해상 활동을 가능하게 한 숨은 영웅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은 때로는 험난하고 위험했지만, 바다를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그들을 바다로 이끌었습니다. 신라의 해상 인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뛰어난 항해술과 해상 역량을 발휘하며 해양 강국 신라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지혜 덕분에 신라는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신라 항해술의 역사적 유산과 현대적 의미: 해양 국가 대한민국의 뿌리
신라시대의 항해술은 단순히 과거의 기술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해양 국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역사적 유산입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 활발한 국제 교류를 펼쳤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대륙적인 특성과 함께 해양적인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신라의 발전된 선박 기술, 항해 지식, 그리고 장보고와 같은 걸출한 해상 인물의 등장은 이러한 해양적인 역량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비록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 해상 활동의 양상과 규모에 변화가 있었지만, 신라가 쌓아 올린 해양 활동의 경험과 유산은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신라 항해술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반도 국가'라는 지리적 특성을 넘어, '해양 국가'로서의 우리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신라가 바다를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였던 경험은 해상 교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또한, 해적의 위협에 맞서 해상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해군력을 강화했던 신라의 역사는 국가 안보에 있어 강력한 해양력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글로벌 무대에서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해양 국가로서의 역량 강화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바다를 통해 이동하며, 해양 자원의 중요성이 커지고, 해상 안보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는 상황에서, 신라의 해양 역사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신라 항해사들이 거친 바다와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맞섰던 용기와 지혜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도전들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줍니다. 불확실성 속에서 길을 찾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공동체의 힘을 통해 어려움을 해결했던 그들의 경험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를 지닙니다. 신라시대 항해술은 단순히 과거의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 바다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발전해온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상징합니다. 해양 강국 신라의 유산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은, 21세기 글로벌 해양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바다의 역사 속에서 미래를 위한 지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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