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에는 차이가 있을까요? 이 글의 말미에 가르침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기본적인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부처와 예수는 각자의 시대와 문화에서 인류에게 중요한 영적 지혜를 남긴 인물들입니다. 이 글에서는 불교와 기독교의 핵심 철학을 비교하며, 두 인물이 인간의 고통, 구원, 삶의 목적에 대해 어떻게 다른 시각을 가졌는지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삶과 가르침의 배경: 부처와 예수의 여정 비교
부처(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6세기 인도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삶의 고통과 죽음을 목격하고 출가하여 진리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반면 예수는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의 평범한 목수로 태어나, 서민들의 삶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이들의 출발점은 다르지만, 모두 인류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사명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처는 내면적 깨달음을 강조했고, 예수는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총과 희생을 전했습니다.
고통과 구원에 대한 이해: 두 철학의 핵심 차이점
부처는 인간의 고통을 집착과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4성제’와 ‘팔정도’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이 과정은 명상과 자기 수양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는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죄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구원론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강조하며, 믿음을 통한 구원을 설파합니다.
명상을 하게 되면 내면의 평화가 생기게 됩니다. 마음의 고요 속에서 스스로를 통제하는 법을 익히게 됩니다.
영적 수련의 방식: 명상과 기도의 차이
부처의 가르침에서 명상은 필수적입니다. 명상은 마음의 고요와 통찰을 얻기 위한 도구로, 해탈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명상을 통해 인간은 집착과 무지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대화를 강조하셨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소원을 비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그의 뜻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관점: 해탈과 영원한 생명
부처는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가르쳤습니다. 열반은 고통과 집착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로, 더 이상 윤회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제시하며, 천국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삶을 상징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믿음을 통한 구원이 사후 세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입니다.
공통점과 차이점: 가르침 속의 조화 찾기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은 겉으로는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부처는 내면의 깨달음을 강조했고, 예수는 외적인 은혜를 통해 구원을 제시했습니다.
부처와 예수의 메시지가 주는 현대적 의미
오늘날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불교는 현대인의 스트레스 관리와 심리 치료에서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기독교는 사회 봉사와 정신적 위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영적 스승의 가르침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부처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보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으니 깨달음이 전부이며 그 다음이 없다고 말하며 또한 그 깨달음은 인간이 노력으로 하는 것이니 인본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알지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깨달음은 인간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세상에 깨닫고 싶은 자가 한두명이 아닌데, 그자들이 그럼 왜 못 깨닫는 것일까요? 노력을 한다고 해서 되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기독교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다느니 하는것은 그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것도 노력을 하면 되는것 아닌가요?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노력한다고 되는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둘다 이 부분에 있어서 똑같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기독교에서는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요?
기도와 명상의 차이
기도와 명상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기도는 두 손을 모으는 자세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도자세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명상은 그럼 어떨까요? 명상 역시 자세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둘다 자세면에서 자유롭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도와 명상 둘다 정신을 하나로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다른점은 기도를 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명상은 신이 아니라 나의 내면쪽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착각을 하는 것이, 나의 내면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내 중심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해보지도 않고 하는 헛소리인 것입니다.
명상은 정확히 말하면 나를 나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핵심은 내가 아니라 나를 이루고 있는 근원적인 무엇이 중심에 있는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나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것이 단어만 다른것 뿐입니다.
근원적인 무엇을 기독교에서는 무엇으로 봐야 할까요? 하나님 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하여 그것은 악한 신이라고 하는데,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걸까요? 만약 근원적인 무엇을 악한 신으로 보는것이라면, 그렇게 말한 자의 하나님은 악신입니다. 이유는 그자가 근원의 존재를 악으로 보고 말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단어때문에 옳다 틀리다라는 사고방식을 갖지 마십시오. 그런 마음가짐 자체가 유치한 발상인것입니다.
그리고 명상쪽에서는 신을 중시 여기지 않습니다. 이유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은 나누어져 있으며, 그것의 역활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인간이 해야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는 기독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장하기를 창세기에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인간은 신의 노리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내용이라고 하는것처럼,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즉,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써 선택을 하는 것이며 그것을 신에게까지 의지하려고 하진 않는것 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매사 모든것을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함과 같지 않습니까? 선택에 대한 결과는 책임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선택은 인간의 몫인것입니다.
우상숭배 종교
기독교 인은 단어에 얽메이면 안됩니다. 단어 자체를 중시하게 되면, 바리세인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을 존중은 하되 그것에 얽메이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명상을 하는 자의 자세와 동일하며, 부처의 가르침과 매우 일치합니다. 부처는 자신을 깨부수라고 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우상화 하지 말라고 합니다. 둘다 같은 뜻입니다.
부처가 자신을 깨부수라는 의미는, 우상화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지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의지하는 행위나 마음은 곧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상숭배는 과연 기독교에서 없다고 볼수 있습니까? 우상은 사람같은 형상만 우상이 아닙니다. 의존하는 형상이 우상입니다. 또한 그 형상이 파괴될때 정신적으로 힘들다면 그것은 우상을 숭배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부처를 깨부수라고 한 것입니다.
기독교가 현재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제국 시절때 황제권 강화 목적을 위해 기독교가 국교로 된 탓입니다. 황제가 기독교 교리 정리를 위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면서 황제에게 좀더 유리한 부분을 취하고 불리한 부분이나 반역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제외시켰으니, 당연히 기독교는 엉터리 종교가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불교와 기독교중에서 인간 본연의 평등을 더 말하는 곳은 불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기독교돟 그랬습니다. 그러나, 언급했듯이 로마제국의 손길을 타면서 기독교는 왜곡되었고 잘못된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무너지지 않을 것 입니다. 새로운 종교로 변화하거나 기독교의 탈을 쓴 신흥종교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유는 그 세력이 바로 현재 겅제 정치를 움켜잡은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그 종교로 많은 이들을 선동하며 세뇌시키게 될 것입니다. 정신차려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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